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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한 잔은 괜찮을까?
알쓰가 보는 ‘음주 정책’의 변화와 의미
최근 지인들과의 저녁 자리에서 조심스레 와인 한 병을 열게 된 일이 있었다. 도수가 낮은 편이라지만, 술을 잘 못하는 ‘알쓰’ 입장에서 한 잔을 채 마시기도 전에 얼굴은 벌개지고, 심장은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자리에서 늘 오가는 말이 있다.
“한 잔은 괜찮잖아.”
“요즘은 단속도 그리 심하지 않아.”
“어차피 대리 불렀으니까 괜찮아.”
술자리에서 건네는 이 몇 마디는 가볍게 들릴 수도 있지만, 사실은 우리 사회가 술과 함께 오랜 시간 맺어온 문화와 정책의 관계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한국은 음주에 관대했던 사회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그 풍경이 확연히 달라지고 있다.
와인 한 잔을 매개로, 오늘은 우리 사회의 음주 정책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천천히 짚어보려 한다.
🍇 1. 음주 문화와 정책, 그 오랜 거리감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음주를 권하는 사회’였다. 회식 자리에서의 술잔 돌리기, 어른 앞에서의 ‘원샷’ 문화, 심지어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술자리를 마련하는 풍경까지, 술은 소통과 협상의 도구처럼 여겨졌다.
정책적으로도 이런 문화는 오랫동안 묵인되거나, 심지어 간접적으로 조장되기도 했다. 과거 주류 광고는 연예인의 이미지에 의존해 젊은 층에게 술을 권했고, 술에 대한 공공 캠페인은 ‘폭음 지양’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해마다 음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꾸준히 증가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음주로 인한 사회경제적 손실은 연간 10조 원을 웃돈다. 음주운전 사고, 알코올 의존증, 폭력사건, 가정 파탄 등 다양한 문제들이 그 비용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한국의 음주 정책은 근본적인 전환의 기로에 서게 된다.
🚦 2. 가장 큰 전환점, 음주운전 처벌 강화
가장 뚜렷한 변화는 단연 음주운전 처벌 강화다. 2018년, 고(故) 윤창호 씨의 안타까운 사고 이후 촉발된 국민적 공분은 결국 음주운전 기준을 바꾸는 입법으로 이어졌다. 이른바 ‘윤창호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 기존 혈중알코올농도 0.05% 이상 → 0.03% 이상이면 면허정지
- 반복 음주운전에 대한 처벌 수위 강화
- 음주 측정 거부 시 처벌 수준 상향
이 변화는 단순한 법률 개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사회 전체가 음주에 대해 관대했던 태도에서 벗어나, 책임 있는 음주 문화를 향한 첫걸음을 내딛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제는 ‘한 잔쯤은 괜찮다’는 말이 점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실제로 와인 한 잔(150ml, 12도 기준)만으로도 혈중알코올농도는 0.03%를 넘어설 수 있다. 단속 기준이 강화되면서, 운전대를 잡을 사람은 한 잔도 마시면 안 되는 시대가 도래한 셈이다.
🚫 3. 공공장소 음주 금지와 거리두기 시대의 전환
음주 정책은 개인의 행동뿐 아니라, 공공 공간에서의 음주 행위에도 영향을 미친다. 대표적인 예는 공원, 하천, 학교 주변 등 공공장소에서의 음주 금지 조치다.
2021년부터 일부 지자체는 조례를 통해 특정 장소에서의 음주를 제한하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한강공원에서의 야간 음주를 금지하는 방안을 검토했고, 일부 지자체는 청소년 유해지역 내 음주행위 단속 강화에 나섰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같은 흐름에 기름을 부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 따라 유흥시설 운영이 제한되고, 다중이용시설에서의 음주 자체가 ‘위험 요소’로 간주되면서 공공 음주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결과적으로, 음주 행위는 점차 ‘개인적인 공간’으로 밀려났다. 이는 혼술·홈술 문화의 확산과도 연결되며, 정책과 문화가 맞물려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 4. 주류 광고 규제와 미디어 변화
“이 술은 가볍고 부드러워요.”
과거엔 이런 대사가 담긴 주류 광고를 공중파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TV에서 주류 광고를 보는 일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주류 광고는 오후 7시부터 다음 날 오전 7시까지 송출이 제한된다.
연예인을 앞세운 광고가 청소년에게 미치는 영향이 지적되면서, 광고 표현 자체에 대한 규제도 강화되고 있다.
더 나아가, SNS와 유튜브 등 뉴미디어 채널에서도 술에 대한 노출이 문제시되고 있다. 특히, 청소년 접근이 가능한 플랫폼에서의 음주 장면은 심의의 대상이 되며, 콘텐츠 제작자에 대한 책임도 강화되는 추세다.
이는 결국 와인 한 잔을 즐기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조차도 공공적 의미를 띠게 되는 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 5. 책임 있는 음주를 위한 캠페인과 제도
정부는 음주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다양한 예방 캠페인과 제도 개선을 시도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알코올 관련 질환 관리’ 항목을 강화하고 있으며,
보건복지부는 ‘절제 음주 캠페인’을 통해 건강 음주 문화를 확산시키려 하고 있다.
또한 직장 내에서는 술 없는 회식 문화, 주 4일제 도입과 연계된 건전한 여가문화 조성 등이 논의되고 있으며, 교육 현장에서는 청소년 음주 예방 교육이 강화되고 있다.
즉, 술을 둘러싼 정책은 처벌 위주의 통제에서 벗어나, 보다 근본적이고 예방 중심의 정책으로 이동 중이다.
🍷 마무리하며 – ‘알쓰’의 입장에서 본 변화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사람, 이른바 ‘알쓰’로서 와인을 대하는 자세는 자연히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조심스러움이야말로 오늘날 한국 사회가 지향해야 할 ‘책임 있는 음주 문화’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와인은 단순히 마시는 것이 아니라, 느끼고, 나누고, 절제하며 즐기는 술이다. 그리고 그런 태도는 우리가 앞으로 구축해 나갈 성숙한 음주 정책과도 연결된다.
술 한 잔이 우리 사회를 바꾸진 않는다.
그러나 그 한 잔을 어떻게 마시느냐는 우리 사회의 정책 철학과 가치관을 반영한다.
이제는 모두가 묻고 있어야 한다.
“한 잔은 괜찮을까?”가 아니라,
“이 한 잔이 책임질 수 있는 한 잔인가?”라고 말이다.